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고택 뒤편, 잊힌 길 - 영월 법흥리 고택 마을 뒷산 폐길

by 쩌니삐삐 2025. 4. 20.

오늘은 고택마을 뒷산 폐길에 대해 글을 작성할 예정입니다.

영월 법흥리 고택 마을 뒷산 폐길
영월 법흥리 고택 마을 뒷산 폐길

 

🌄 고택 뒤편, 잊힌 길의 입구에서


영월 법흥리. 이 마을을 처음 찾는 사람은 대부분 고택들을 먼저 떠올린다. 옛 선비들이 살았던 기와집과 고풍스러운 담장이 조용한 시간을 품고 있는 동네. 하지만 고택이 끝나는 지점, 마을의 가장자리에 서면 작은 오솔길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. 이 길은 마을 사람들도 요즘엔 잘 걷지 않는 폐길이다.

예전엔 이 길로 산을 넘어 장에 갔다고 한다. 말 그대로 ‘장터 가는 길’. 차도 없고 편의점도 없던 시절, 주민들이 무거운 바구니를 지고 걸었던 그 길은 지금은 이름도, 표지판도 없다. 대신 풀들이 허리춤까지 자라 있고, 돌계단은 대부분 무너져 있다.

하지만 자세히 보면 아직 그 길은 살아 있다. 마치 오랜 잠에 든 듯, 얌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느낌. 고택 담장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나뭇가지들 사이로 얇게 드러난 흙길이 눈에 들어온다. 바로 그곳이 법흥리 폐길의 입구다. 지도로는 나오지 않지만, 마을 어르신 몇 분은 이 길을 여전히 ‘익숙한 길’로 기억한다.

 

🥾 잡초를 헤치고 걷는 ‘과거의 길’


폐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처음엔 조금 험하다. 나뭇가지가 어깨를 치고, 잡초가 발목을 스친다. 하지만 그 불편함조차 이 길의 일부다. 정비된 산책로와는 다른, 이 길만의 ‘거친 정직함’이 있다. 자연 그대로의 시간, 사람의 손을 오랜 시간 타지 않은 길만이 줄 수 있는 느낌.

중간중간, 오래된 돌담의 흔적도 보인다. 지금은 무너져 있지만 누군가 손으로 정성껏 쌓았을 그 돌들이 이 길의 옛 용도를 말해준다. 곳곳에 낮은 계단 흔적도 보이고, 무심하게 자란 들꽃들이 발끝에 인사한다. 한여름에도 나무들이 햇살을 막아줘, 땀이 흘러도 어딘가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.

이 길은 목적지가 없는 길이 아니다. 분명 누군가에겐 생계와 연결된 실용적인 길이었고, 지금은 기억 속으로 이어지는 감성적인 길이다. 걷다 보면 이상하게도 외롭지 않다. 마치 이 길을 걸었던 누군가의 숨결이 길을 따라 흘러가는 것처럼, 조용한 동행자가 곁에 있는 기분이 든다.

폐길은 오래지 않아 산등성이로 이어지는데, 이쯤 오르면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인다. 이곳이 이 폐길의 하이라이트다.

 

🌤  전망 끝에 남는 감정 하나


법흥리 폐길의 정상에 서면, 발 아래로 고요한 마을이 내려다보인다. 기와지붕 몇 채와 흙담, 땀에 젖은 논밭의 초록빛. 그리고 멀리 흐르는 서강의 푸른 물결. 인위적인 전망대가 아닌, 자연이 빚은 진짜 전망이다. 이곳은 사진으로 다 담기지 않는다. 눈으로 직접 보아야 하고, 걸어 올라야 느낄 수 있다.

잠시 그 자리에 앉아 숨을 돌린다. 마을에서 여기까지 20~30분 남짓. 짧지만 울림은 길다. 이 길을 매일 오르내리던 누군가의 뒷모습이 상상된다. 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힘들어 쉬었던 그 자리일지도 모른다.

이곳에서 내려다보는 마을은 더 이상 배경이 아니다. 그 안에 살던 사람들의 삶, 시간, 정겨움이 다 녹아 있다. 폐길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, 누군가가 다시 한 번 걸어줄 때마다 조용히 깨어난다.

그리고 그런 길을 걷는 우리 역시, 무언가를 기억해내는 사람들이 되는 셈이다. 법흥리 폐길은 그냥 ‘오래된 길’이 아니라, 기억의 조각들을 다시 이어주는 실 같은 존재다.